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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로지향 연수기

  • 운영자
  • 조회 1221
  • 2013.03.08 00:00

제1회 안동시교육관계자 추로지향 연수를 다녀온 안동여고 이재호 교장 선생님이 보내오신 글을 올립니다.

꼼꼼하게 정리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사진을 중간중간에 넣어 설명한 내용을 파일이 너무 커 문장만 올리고

사진은 사진방의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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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등정과 추로지향 방문

 

안동대학 공자학원이 주관하는 ‘추로지향 연수’차 교육장과 관내 고등학교장 10명이 2013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4박 5일간 ‘추로지향’을 다녀왔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노나라요 맹자가 태어난 곳이 추나라로 지금은 중국 산동성에 속해 있다. 2월 17일 새벽 5시 20분, 안동을 출발하여 인천공항을 거쳐 중국 산동성의 제남공항에 도착하였다. 산동성은 서해 바다 건너편에 위치해 있어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깝고 인구는 9,300만 명 정도 되며, 면적은 대한민국의 1.5배 정도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성(우리나라 행정구역으로는 도에 해당)이다.

 

 

날씨는 안개인 듯 매연인 듯 흐릿한 게 우리나라에서 겪던 황사가 아주 심한 날과 비슷하였다. 가시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마치 안개 속을 거니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공항에 대기하던 전세버스를 타고 재중 동포 3세인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제남 시내에 위치해 있는 대명호로 향하였다. 제남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도청 소재지인데 날씨 탓인지 온 도시가 회색빛으로 우중충해 보였다. 중국은 아직도 설 명절 중이라 문 닫은 가게들이 많고, 거리 곳곳에는 붉은 등과 붉은 천에 소원을 적은 금색 글씨가 휘황찬란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남은 연중 강수량이 적은 곳이지만 지층이 석회석으로 되어 있어 지하로 물이 흐르거나 솟아올라 여러 개의 자연 호수가 생겨났다고 한다. 대명호는 그 중의 하나로 석회 동굴에서 흘러 온 물로 연중 섭씨 18도 정도가 유지 되며, 주위 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대명호에는 춘절(음력설을 전후한 3주정도의 명절 기간)이라서 그런지 연인과 가족 단위로 관광 온 사람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흐릿한 안개 속에서 드넓은 대명호수와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을 구경하고, 각 지방의 민속놀이를 축소하여 재현해 놓은 표돌성경과 제남시의 중심 광장인 천성광장을 둘러보고 예약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둘째 날 아침 8시경, 중국 황제들이 천신께 제사를 올렸다는 태산을 오르기 위해 전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시황, 한무제, 수양제, 장개석 같은 지도자가 태산에 올라 천신께 제사를 올렸다고 하는 유명한 산이다. 나는 양사언의 시조 때문에 그 태산을 오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앞섰지만 한 편으로는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태산에 올라 소원을 빌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가이드도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태산에 올라가 소원을 빌었더니 금방 아기가 생겼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며칠 전 일기 예보에 비가 올 것 같다고 했는데 마침 날씨가 쾌청하여 태산을 오르기는 더 없이 좋은 날씨인 듯 했다. 제남에서 태산으로 가는 길은 평야지대라 거의 일직선으로 고속도로가 쭉쭉 뻗어 있었다. 고속도로 양편으로는 향나무와 측백나무, 히말라야시다 가 줄 지어 서있고, 들판에는 주로 밀농사를 짓고 있었고, 방풍림과 목재 생산을 위한 미루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우리는 9시 20분 경 태산 입구에 도착하여 입장료를 내고, 미니버스를 타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25분 정도 걸려 태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이 곳부터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거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 가는 길이 있었다. 우리 가 버스 종점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단은 만리장성을 연상케 했다. 해발 800m 지점에서 정상까지 3.3km 되는 가파르고 먼 길을 7,333개의 돌계단으로 만든 것 자체가 경이로운 것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약 3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걱정이 앞섰으나 70세 고령의 P고의 윤교장 선생님의 ‘또 언제 이 곳에 오겠느냐. 정상까지 올라갑시다.’라는 외침에 용기를 얻어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1시간여가 지나자 숨이 가쁘고 다리가 아파 왔지만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있겠는가?’ 라는 말을 떠 올리며 오르고 또 올라갔다. 태산을 오르는 길목에는 용문, 중천문, 남천문이 있다. 중국인들은 중천문까지는 인간의 세계라 하고, 남천문 부터는 신선의 세계라 한다고 했다.

 

 

 

용문을 지나고 남천문을 바라보며 깔딱 고개를 오르는데 기진맥진하였지만 누구 한사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하여 가파른 계단을 올라 드디어 남천문을 통과하였다. 드디어 인간의 세계를 벗어나 신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하늘 가까이 다다르니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깨끗해진 것 같았다. 남천문을 지나니 평평한 돌 포장길이대로처럼 넓었다. 정상 부근에는 식당과 상점, 호텔, 사찰 등의 건물이 세워져 관광객의 편의는 좋아졌지만 자연의 모습은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태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편리하게 먹고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태산 등정의 성취감과 영험한 태산 신께 소원을 빌기 위해 오른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있는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지은 건물은 그런대로 이해가 갔다. 그러나 태산 정상의 식당과 상점과 호텔은 그게 아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상 부근 여기저기에 건물이 들어서 최고봉 1,545m는 그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태산 정상에 올랐을 때는 날씨가 맑아 산 아래 태안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태산에 올라 태안시내를 볼 수 있는 날이 일년에 사나흘 정도 될까 말까라고 하는데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태산 정상에는 천신(옥황상제)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청춘남녀가 이 곳에 와서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그 징표로 쇠사슬에 자물쇠를 채워놓아 사당 앞마당이 온통 자물쇠 천국이었다. 여러 명이 모여 평평한 산정에서 저 마다의 소원을 빌며 어떤 의식을 행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곳은 그 옛날 황제가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고 했다. 산 정상의 건물 안에는 천신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저마다 소원을 빌며,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천신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며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태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옆에 큰 바위 절벽이 있었다. 그 바위에는 붉은 색, 푸른 색, 금색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태산에 올랐던 황제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문인과 정치가들이 저 마다 의미를 담아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양귀비를 사랑했던 당나라 헌종의 금색 글씨가 반듯한 필체로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태산 등정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바람이 잔잔해져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계곡을 굽어보는 정경은 아찔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태산을 내려와 태산 신을 모신 사당인 <대묘>에 들렀다. <대묘>는 해발 10m 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 3대 고건축물(다른 2개는 북경 자금성에 있는 태화전과 공자 사당인 공묘)의 하나로 크고 웅장하였다. <대묘>의 내부에는 위엄을 갖춘 천신이 모셔져 있었다. 태산을 오르는 황제는 이곳에서 태산 신께 제사를 지내고 나서 태산을 올랐다고 한다. <대묘>에서 태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10km 정도이다. <대묘>는 긴담으로 둘러져 있고 뜰에는 궁궐 기둥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름드리 향나무와 측백나무가 즐비하였으며 일천년 묵은 은행나무와 2천 년 된 측백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진시황이 영토 표시로 세운 비석도 볼 수 있었다.

 

 

오후 3시 20분경 <대묘>를 출발하여 곡부시로 향하였다. 고속도로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판에는 밀과 미루나무뿐이었다. 강수량이 적으니 논이 없고, 주로 밀과 옥수수를 2모작으로 번갈아 심는다고 했다. 가끔씩 보이는 산은 온통 바위산으로 측백나무가 군데군데 보일 뿐 황량한 돌산이었다. 곡부시는 시내의 인구가 20여만 정도이고 외곽의 인구와 합쳐서 62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 중에 공씨 성을 가진 사람이 12만 명 정도 된다고 하니 공씨 집성시인 셈이다. 도시 분위기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신라 고도인 경주와 나 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과 비슷한 곳이다. 곡부시는 안동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와 퇴계 선생은 양국의 사표가 아니던가. 맹자의 고향도 이곳 곡부와 이웃해 있어 여기가 바로 ‘추로지향’인 것이다. 곡부시는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고층 건물이 없고, 도로가 넓고, 깨끗하여 계획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곧 바로 중국 측 초청자인 곡부사범대학으로 향하였다. 16시 30분경 곡부 사범대학에 도착하니 국제교류처장이 나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인사가 끝난 후, 공자학을 전공하는 교수로부터 1시간 남짓 공자사상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공자 사상의 특징을 자기 성찰과 인애, 인간의 행복 문제와 결부시켜 풀어 주셨다. 이런 덕목들은 21세기와 미래 사회를 위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궐리번사>라고 하는 유명한 식당에서 곡부사범대학 총장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하여 공자 가에서 전해 오는 진기한 요리를 맛 볼 수 있었다. 중국은 손님 접대가 유별난 곳이다. 기본적으로 주최 측 주빈과 부 주빈이 8차례의 건배가 있고, 상대측 참석자 전원의 건배와 우리 측 대표의 건배 등 술과 대화로 분위기를 돋우고 우호 증진을 꽤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술이 약한 나는 곤혹스러운 의식이었다.

 

 

 

방문 셋째 날이 밝아오자 곡부에서 성역화 되어있는 공자사당인 <공묘>를 찾아갔다. <공묘>는 후대에 성곽을 쌓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였다. 애초에는 공자 사당이 적당한 크기로 조성되었으나 역대 황제들이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계속해서 문을 만들고 성곽을 넓혀 지금의 크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복궁보다 규모가 크고 건물도 많았다. 황조가 바뀌어도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공자 종손에게 대대로 연성공이라는 직위를 주어 극진히 대우했으며 <공묘>도 왕궁처럼 큰 규모로 증축 시켰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적인 유적에는 수많은 문들이 있다. 공자 사당에는 무려 10개의 문이 있어, 이 문을 차례로 통과해야 공자의 사당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문과 문 사이 정원에는 수많은 비석과 건물, 수백 년 묵은 측백과 향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측백과 향나무가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고목으로 칠팔 백년 또는 천년 이상의 세월을 지켜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는 바로는 공자의 제자가 삼천이라고 하는데 역사에 기록된 제자는 72인 정도다. 공자의 제자 72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공묘> 안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종묘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10번째의 문을 통과한 다음에 나타나는 웅장한 건물이 바로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이다. 중국 3대 고건축물의 하나로 자금성에 있는 태화전보다 높이가 벽돌 한 장 만큼 높다고 한다. 과거 공자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대성전> 안에는 ‘대성지성 문성왕’이라 쓴 편액과 공자상이 중앙에 있고, 양 옆에 안회, 증자, 자사, 맹자의 4성을 모셔 놓고 있었다.

 

 

 

공자 사당을 참배한 후, 옆으로 돌아 나오니 <노벽>이란 글씨와 붉은 담장이 세워져 있었다. <노벽>은 춘추전국시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모든 문서를 불사르라고 했을 때 공자의 후손은 목간으로 된 귀중한 경전을 비밀리에 땅 속에 묻고 그 위에 벽을 세워 놓았다. 많은 세월이 지나고 담장이 헐어 수리를 위해 땅을 팠을 때 목간 형태로 된 경전이 나옴으로써 당시의 경전이 전해 질 수 있게 되었다. 진시황의 서슬 퍼런 명령 앞에서도 공자가의 후손은 목숨 걸고 가문의 귀중한 문서를 지켜냈던 것이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 기개는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칭송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 옆에는 공자가 생전에 사용했던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공자 사당을 나와 이웃해 있는 <성부>로 갔다. <성부>는 공자 후손들이 사는 마을로 공자 종택이 있는 곳이다. 당시 공자 종택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4급 이하 관리들은 제 1 접견실 이상은 들어갈 수 없고, 그 곳에서 대기하며 공무를 처리하고 돌아갔다고 하며, 제 2접견실은 그 이상의 고급 관리들이 연성공(공자의 종손이 맡은 벼슬)이 들어오라고 할 때 까지 머물던 휴게실 겸 사무실로 아직도 보존되어 있었다. 공자의 77대 종손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하며, 78대 종손은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간 이후 당국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공자 종손이 살던 집에는 평소에 사용했던 침대와 가구들이 남아 있었다. 후원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어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할 수 있도록 제법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성부>를 나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공자 가문의 공동묘지인 <공림>으로 향했다. 공림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수백 년 묵은 측백과 향나무가 푸른 기개를 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공림 입구에서 다시 오픈카로 갈아타고 공자의 묘를 찾아갔다. <공림>은 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죽어서 묻힐 수 있는 공씨가의 공동묘지 인 셈이다. 벼슬을 한 사람은 묘 앞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화장하여 작은 봉분으로 묘를 쓴다고 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숲길을 달려 공자의 묘 앞에 도착하였다. 공자의 묘는 왕릉처럼 꾸며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들 묘가 있고, 앞에는 손자인 자사의 묘가 있었다. 공자묘의 배치는 아들을 옆에 앉히고, 손자를 무릎에 안고 있는 형상이라 했다. 공자의 묘 옆에는 제자들이 시묘 했던 곳이 지금도 남아 있었고, 자공은 장사를 하느라 스승을 가까이서 모시지 못했다며 다른 제자들 보다 3년 더 시묘를 살았다고 한다.

 

 

<공림>을 돌아 본 후 점식 식사를 하고 추성시에 있는 맹자가문의 공동묘지인 <맹림>으로 향했다. <맹림>의 규모는 <공림>에 비해 훨씬 작고 정리 되지 않아 허허로운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맹자의 무덤은 다른 곳에 있고, 맹자 부모와 맹씨 일가들의 무덤이 공동묘지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다. 공림을 보고 난 뒤라 실망감이 들어 대충 둘러보고 나오게 되었다. <맹림>을 둘러 본 후 맹자의 종손과 일가들이 사는 마을인 <맹부>로 갔다. 맹부에는 맹부 종택이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어 공자 다음의 ‘아성’으로 공경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맹부>를 둘러보고 나서 공자의 출생지인 니산으로 향했다. 니산은 우리나라로 치면 두메산골 같은 곳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은 온통 돌산으로 측백나무와 향나무 가 군데군데 자라고 있을 뿐 다른 나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끔씩 나타나는 회색 콘크리트 집들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들판은 척박한 듯 미루나무와 밀이 반반 정도 심어져 있었다. 바람도 심하게 주는 곳으로 미루나무가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황사와 희뿌연 안개와 벌판과 돌산은 어딘지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중국의 과일이나 채소가 우리 것 보다 맛이 없는 이유가 흐릿한 날씨 때문에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땅이 척박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로 1시간 쯤 달리다보니 바위로 된 민둥산 자락에 향나무와 측백나무의 숲이 우거진 작은 동산이 나타났다. 그 동산이 바로 공자가 태어난 곳이라 했다. 동산에는 공자와 제자들이 공부하던 <니산서원>이 있고, 공자의 부모 제사를 모시던 사당과 전시관 등이 있었다. 전시관에는 공자가 살아온 주요장면들이 옥으로 나타낸 그림 10폭으로 꾸며져 있었다.

 

<니산 서원>을 둘러보고 오솔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공자의 어머니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산기를 느껴 공자를 낳았다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 곳이라서 그런지 공자가 태어난 주변 동산만이 푸른 침엽수가 자라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공자의 이름인 구가 이 언덕 ‘구’자에서, 중니라는 자가 니산의 '니'자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자가 태어난 마을을 돌아 나오니 마을 앞에 니산 호수가 펼쳐져 있어 이색적인 경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는 니산 방문으로 제3일차의 연수를 마치고 곡부의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농촌 풍경은 우리의 농촌보다 쓸쓸하고 적막하게 느껴졌다.

 

 

 

제 4일차 아침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곳이 <공자연구원>이었다. 중국에서 눈 깜짝할 사이는 30분 이내를, 잠깐은 2~4시간을, 한참은 5시간 이상을 말한다고 한다. 중국인의 느긋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연구원>은 국가가 세운 유일한 공자 연구 기관으로 작년에 모든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부원장의 설명에 의하면 연구원은 유학 사상과 예와 악, 중국의 전통 사상과 결부시켜 치밀하게 설계되어 졌다고 한다. 모든 건물과 계단 바닥에 이르기 까지 고급 재질의 화강석을 이용하여 연구원 전체가 멋스러워 보였다. 이 곳에서는 유학 관련 국제회의가 열릴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서원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중국도 산업화가 진행 되면서 공맹 사상을 통하여 국민들의 윤리의식을 고취하려는 듯이 보였다. <공자연구원> 2층 회랑에는 우리나라와 일본, 베트남 3국의 유학 발전 과정을 소개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안향, 퇴계, 율곡, 이충무공 같은 분의 사진과 업적 등 유학 관련 내용이 게시 되어 있었다. <공자연구원> 앞으로 나 있는 대로는 공자를 기념하여 대성로라 이름 짓고, 연구원에서 나와 오른 쪽으로 가면 공묘, 왼쪽으로 가면 맹묘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자연구원>을 둘러보고 나서 곡부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갔다. 그 곳도 봄 방학 중이라 학생들은 없고, 교장선생님과 선생님 몇 분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회의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학교 현황과 주요 교육활동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그 학교는 남녀 공학으로 학생 수는 3,000명이었다. 교육과정은 국가가 정한대로 운영하고, 방과후 활동은 우리와 거의 비슷하였다. 중국도 우리처럼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상당히 높고, 대학 진학률이 80% 정도 된다고 했다. 이 학교는 학력 수준이 높아 전국 20위권에 드는 명문 고등학교에 속한다. 대화 마지막 부분에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학생들의 교류와 다양한 문화 체험을 위해서 자매결연 문제가 논의 되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학생 30명과 교사 4명 정도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다. 안동고는 즉석에서 자매결연을 제의하여 좋다는 응답을 받았으나, 나는 귀국해서 학교 선생님 및 학생들과 의논한 후에 결정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한국생명과학고도 다른 농업학교와의 자매결연을 희망하였다. 1시간 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어 그 곳 교장선생님이 베푸는 점심 만찬에 참석하고, 제남시로 이동하여 16시경에 산동성 사회과학원에 도착 하였다. 산동성사회과학원은 산하에 사회과학, 역사연구 등 13개 연구소를 두고 있었으며 연구원이 300명 정도 되는 산동성의 씽크탱크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우리는 2시간 가까이 사회과학원장 및 분야별 담당 부장들과 마주 앉아 격의 없는 대화의 시간(워크 샵)을 가졌다. 주로 교육 문제가 논의 되었고, 그 밖에 환경 문제, 농촌 문제, 남북문제, FTA 등 서로의 관심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저녁에는 사회과학원장이 베푸는 만찬에 초대를 받아 밤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담소를 나누며, 40여 가지나 되는 황제식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중국은 손님 접대가 융숭하고, 우리의 접대 문화보다는 진정성이 있어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었다. 이런 점은 우리가 배워야할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산동성에는 1만 여개의 한국 업체가 진출해 있고, 10만 에서 15만 명 정도의 한국인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내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정치적인 자유는 누리지 못 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자유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듯이 보였다. 중국은 미국 다음 가는 강대국이다. 지금은 산업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다소 뒤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빠른 속도를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과의 수출 경쟁에서 이겨야 하지만 앞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양국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중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도시로의 인구 집중, 물질만능주의 풍조, 계층간의 소득 격차, 환경오염 등 많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득 격차 해소, 환경오염 예방 대책, 정신문화를 고양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았다. 어느 사회이건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이고 꿈이다. 21세기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 협력을 확대하여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며, 국가간에도 상생 발전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 ‘추로지향 연수’는 중국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앞으로 학생들에게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키우는데 더 많은 지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 5일차인 2월 21일 새벽 4시 40분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 5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제남 공항으로 향했다. 날씨는 우리가 올 때처럼 안개인지, 황사인지 공항 전체가 흐릿했다. 9시 30분경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대절 버스가 기다리고 있어 마음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이번 연수에서도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던 중국측 인사들과 유창한 중국어로 우리의 안내를 맡아준 안동대학의 이윤화 원장님과 연수에 함께 참여했던 동료 교장선생님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태산 정상에 올라서 빌었던 우리들의 작은 소망들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며 두서없는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재호(안동고 교장)

(2013년 2월 28일 정리)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4-04-24 17:08:48 추로지향 문화체험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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